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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자체는 센스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글 자체는 즐겁게 읽히는 내용이었다.
나는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고전'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도 <금방울 전>, <숙향전> 등등 '~전'을 좋아했고 전래동화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씨남정기 같은 암투물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아주 얕게 재미 부분에서만 흥미를 보였을 뿐, '고전'의 새로운 해석에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2007년 10월에 출간된 이 책은 권순긍 교수가 고전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또 당시 사회 분위기와 함께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중간중간 작가의 재치있는 문장들과 생각들이 읽기 가볍게 만들어준다. 나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텍스트로는 김시습 <금오신화>, 허균 <홍길동전>, <박씨전>, 김만중 <구운몽>, 박지원 <방경각 외전>, 박지원<열하일기>,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이 있고 마지막에는 '고전소설, 어떤 작품을 읽을 것인가'라는 짧은 글로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고전 자체를 읽은 지도 꽤 되어서 책을 읽으면서 '맞아, 이런 내용이었지?' 하고 다시 알 수 있어 즐거웠다. 그리고 작가 미상이 아닌 텍스트는 먼저 작가 소개를 아주 자세히 풀어주고 어떻게 이런 작품이 쓰였는 지 차분히 설명해줘서 좋았다. 그리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의 뿐만 아니라 한계점까지 세세히 알려주니 고마운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나 <춘향전>을 단순한 사랑이야기로 풀어내는 게 아니라 왜 기생의 딸 춘향이 '변사또'가 아니라 '이몽룡'을 선택했는 지에 대해 되짚어보고 다른 '미기담'(아름다운 기생을 사이에 두고 한량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내용)과는 어떤 식으로 다른가에 대해 살펴 보고있다.
아름다운 꽃을 꺾듯이, 그런 사랑 이야기 속 여성은 단지 장식물에 불과하며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이야기이다. (중략)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살아 있는 여성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중략) <춘향전>이 여느 미기담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춘향전>은 제목처럼 여성 주인공 춘향의 이야기인 것이다. -p.125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춘향이 목숨을 바쳐 지키는 '열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녀'라는 프레임은 당시 여성들에게 순결을 강조하기만 한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춘향이 목숨 바쳐 지켰던 것은 '열'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말한다.
춘향과 비교해볼 때 이몽룡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상대일 뿐이고 명문대가의 양반이기에 사랑의 성취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춘향은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이룬 것이 아니라 천민인 기생도 한 인격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분해방'을 실현시킨 것이다.
<춘향전>은 한국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 천민의 처절한 투쟁사다. 이 끔찍한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춘향전>은 비로소 위대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p.129
<춘향전> 뿐만 아니라 저자가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이 워낙 재밌어 누구라도, 특히 고전을 공부하는 청소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 하다.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좀 적어두겠다.
세상을 깨우치고 또한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판타지라도 좋다는 것이다. 전기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런 비현실성과 낭만성을 부당한 현실의 횡포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시습은 이 전기소설을 접하고 "나의 평생 뭉친 가슴을 쓸어 없애주리라"라고 했다. (중략) <전등신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작품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고 비현실적인 설정은 하나의 흥미요소로 작용하지만 <금오신화>의 작품들은 대부분 비극적이며, 그것은 부당한 세계의 횡보로 인한 생의 단절을 거부하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p.22~23
그러기에 우리는 홍길동에게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 이미지를 덧씌우면 안 된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은 어디까지나 중세의 의적일 뿐이다. -p.34
박대하던 시어머니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던 남편은 물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박씨를 따른다. 박씨는 허물을 벗고 미녀가 됨으로써 많은 능력을 얻었다. 여자의 능력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가 미美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인가 보다. -p.47
(박씨전의 한계)
이들 조선의 여성들은 노예가 되어 여기저기를 전전했다. (중략) 이들이 바로 '환향녀'로 처음에는 '고향에 돌아온 여자들'로 불렸는데, 세월을 거치면서 '환향녀'라는 말이 성적인 방종을 뜻하는 '화냥년'이라는 치욕스런 이름으로 의미가 바귀게 되었다. 조선판 '주홍글씨'인 셈이다. (중략) 힘없는 남자들 때문에 잡혀간 여자들이 온갖 고통을 당하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왔으나, 남자들은 오히려 그 여자들을 욕하면서 자신들의 무능함을 덮으려 했다. 이야말로 적반하장인 셈이다. 병자호란 후에 가졌던, 바로 이런 여성들의 원망과 분노가 <박씨전>에 녹아들었다. -p.54~55
그토록 온갖 부귀를 다 누리고 즐거운데 무엇 하러 꿈에서 깨어나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꿈에서 깨어나 도달한 세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꿈이 아니라고, 또는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것이 거짓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세속적 욕망을 긍정하는 것도 이를 부정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속적 욕망의 적극적 추구와 이를 거부하고 도에 귀의하는 그 두 극단의 사이에 무수한 편차가 존재하고 우리의 삶은 그 지향과 고민의 심도에 따라 각기 다르게 규정되게 된다. -p.69~71
양반과 신분 차이가 나는 여향인을 주인공으로 이들의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의 자세와 가치관을 통해 거꾸로 양반을 풍자했다. (중략) 이들은 흥부전>의 놀부와 정반대로 자본의 긍정정ㄱ인 힘을 보여준다. 중세 신분제가 무너지고 근대 자본주의가 다가옴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다. -p.94
호구지책을 마련하고자 죄 지은 사람을 대신해 매를 맞아주는 매품을 팔았지만, 이 마지막 수단마저 나라에서 사면령이 내려 어이없이 끝나고 만다. 이처럼 흥부는 살아가려고 발버둥쳤지만 가난의 굴레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인데 과연 흥부를 게으르고 소극적이라 할 수 있을까? -p.157
게다가 놀부가 망해가는 과정이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탐욕스런 이익추구 때문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몇통의 박을 탔는데도 금이 나오지 않으면 아닌가 보다 하고 그만둬야 하는데, 놀부는 탐욕에 눈이 멀어 끝까지 가본다. -p.159
<흥부전>의 문제를 결국 '돈과 윤리' 문제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이 사회에서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거기에는 마땅히 '돈의 철학'이라고 하는 윤리 문제가 개입돼야 한다. "어떻게 돈을 벌었나"나 "어떻게 돈을 써야만 하는가"의 문제이다. -p.161
조정 중신이랍시고 우르르 모인 생선 떼를 상상해보자. 이 자체가 얼마나 기막힌 풍자인가. 조정 중신이 실상은 생선이고, 생선 비린내는 바로 썩어빠진 조정에 대한 풍자인 셈이다.-p.170
자라는 용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지만 그의 처를 탕감으로 제공하려는 행동에서 보이듯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패한 봉건체제에 의해 이용과 희생을 당하는 처지가 독자로부터 동정을 얻도록 만든다. -p.176
배비장의 :양반의 눈보다 쌍놈의 눈이 대단히 무디다"는 말을 되받아 "눈이 다르니 마음까지 달라 당신은 컴컴하고 음탐하냐"는 방자의 반문에 단번에 양반의 위세를 거꾸러뜨리는 묘미가 있다. 풍자가 무엇인가? 적어도 도덕적 우위를 차지했을 때 가능하다. -p.187~188
우리가 '통속애정소설'이라고 부르는 작품의 주인공은 대부분 갈등을 겪다가 사랑보다는 돈이나 권력 쪽을 택한다. 1910년대 통속애정소설의 시작이라고 하는 <장한몽>에서는 여주인공 심순애가 이수일보다 돈 많은 김중배를 택한다. (중략) 그러나 <채봉감별곡>에서는 두남녀 주인공이 부모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면서까지 사랑을 적극적으로 추구해나간다. (중략) 채퐁과 장필성이 이루어가는 사랑의 의미는 단순한 남녀의 애정문제가 아니라 '개성 존중', 더 나아가 그릇된 가부장권이나 부패한 세도정권과의 싸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p.203~205
고전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정체성의 확인으로서 민족적 사고의 원형을 찾는 데 의미가 있고, 또한 이를 다양하게 확장, 발전시키기 위한 이른바 민족문화 콘텐츠로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p.211
*전기소설-애정전기 포함
<금오신화> <금방울전> <주생전> <최척전> <운영전> <영영전>
*영웅소설-역사군담, 창작군담
<홍길동전> <전우치전> <임진록> <박씨전> <임경업전> <유충렬전> <조웅전> <정수경전> <홍계월전> <신유복전>
*가정소설-쟁총형, 계모박해형
<구운몽>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김인향전>
*대하소설
<옥루몽> <임화정연>
*애정소설
<숙향전> <숙영낭자전> <옥단춘전> <윤지경전> <채봉감별곡>
*세태소설
<배비장전> <오유란전> <이춘풍전> <옹고집전> <김학공전>
*우화소설
<두껍전> <서대주전> <장끼전>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화용도>
*한문소설
-연암소설: <방경각외전> <허생전> <호질>
-이옥소설: <이홍전> <심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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