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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스테판 에셀<분노하라>

김줌줌 2018. 4. 28. 16:52


 <분노하라>는 분량만 보자면 굉장히 짧다. 그러나 안에 담겨있는 저자의 메세지는 묵직하고,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책을 읽고 난 후 감상문을 남기는 지금까지도 나는 이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을 읽기 전 저자 소개를 읽으며 나는 몇 번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1917년 출생하여 2013년에 숨을 거둔 저자의 일생은 그야말로 세계사였다. <구토>로 유명한 사르트르의 후배였고 또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유대인 수용소까지 가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는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그 이후로도 쭉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하신 연세가 93세였다고 하니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아마 저자 스테판 에셀이 지내온 삶이 이렇기 때문에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무게도 결코 가벼울 수가 없는 게 아닐까. 


 짧지만 군더더기 없이 농축액처럼 진한 의미를 주는 책이라 마음에 새길 부분이 많다. 길어질 것 같지만 일단은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 특히 감동 깊었던 부분들을 적어보겠다.


'이제 민영화된 은행들은 우선 자기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 연봉 액수에나 관심을 보일 뿐, 일반 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15쪽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이것은 절대자유주의의 메세지였다.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한다. -18쪽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박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21쪽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어쨋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31쪽


 '폭탄을 던지는 테러리스트를 용서는 못하더라도 이해난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1947년에 이렇게 썼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거하는 행위 자체가 자칫 폭력을 영속화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32쪽


'정치에서는 폭력적인 희망이란 없다. 사르트르는 1980년 3월, 임종을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끔직한 지금의 세계가 기나긴 역사의 발전 속에서 보면 그저 한순간일 뿐인 이유를, 숱한 혁명과 봉기를 이끈 주도적 힘의 하나는 언제나 희망이었음을, 내가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래도 미래는 희망이라고 보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3쪽


'(중략)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권을 발판으로 삼아야 하며,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하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34쪽


'분명 "레지스탕스에 동참한 형제자매들의 희생과 파시즘의 야만에 맞선 여러 나라의 단결 덕분에 나치즘은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불의에 맞서는 우리의 분노는 여전히 그래도 살아있다" 고.


 그렇다. 위러한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38~39쪽



 여기까지가 내가 본문에서 읽으면서 저자의 메세지가 가장 깊게 닿았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테러리즘, 폭력, 그리고 대중 언론매체를 경계하고 분노하며 국제사회가 보편화된 인권이라는 단단한 사다리를 딛고 미래세대('우리 세대')가 더 나은 진보를 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특히 마지막에 호소하는 메세지에서는 저자의 인류애가 느껴져 읽으며 가슴이 절절해졌다. 

 비로소 내가 엊그제 읽었던 <인간 실격>이 왜 내겐 명작으로 다가오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인간 실격>의 감상문에서도 말했듯이 요조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만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그 속에 저항과 분노가 없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밝힌다. 나는 허무주의가 두렵다. 앞으로도 내 삶을 살아가면서도 허무주의를 기피할 것이다. 

 이 책은 본문과 편집자 후기, 저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조국 교수의 추천사로 이루어져있다. 아무래도 우리 한국의 상황과 더불어 살펴본다면 조국 교수의 추천사까지 다루는 것이 맞는 듯하나 나는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편집자 후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 저자 스테판 에셀의 영화 같은 삶을 더 상세히 적어둔 편집자 후기에서 저자와 함게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을 함께 작성한 위원회의 위원들을 알게 되었다. 엘레너 루스벨트(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부인이자 참여적 여성 운동가, 위원회장), 중국인 창 박사(그는 세계 인권 선언에 서양적 사고만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 샤를 하비브 말리크, 르네 카생, 존 피터스 험프리. 특히 눈이 갔던 두사람은 엘레너 루스벨트와 창 박사였다. 그들의 참여와 고심으로 세계인권선언문은 좀 더 소수자까지 생각하게 될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엘레너 루스벨트에 대해서는 나중에라도 꼭 따로 알아보고 싶다.)

 

사실 본문만큼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와의 인터뷰이다. 본문에서 전하고 싶은 바를 다시 한번 짚어주면서 저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 깨달았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의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나 나름으로 어떻게 문제해결에 참여할 것인가." 이 참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55~56쪽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하며, 마음 교육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56쪽


'암송하여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인 시 구절들의 아름다움, 이것도 나의 행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나의 내면 곳곳에 시가 깃들어 있고, 살아오면서 최악의 순간에도 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도 셰익스피어, 괴테, 횔덜린의 시구에 담긴 운율의 힘을 빌려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57쪽


'바로 이 시점에 시민 대중은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60쪽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세 단어로 짧게 줄이면 여전히 이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62쪽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65쪽


'제도들이 민주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기가지 시민들의 참여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일반인들이 항상 잘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교육도 부족하지만 정치적 창의성도 부족합니다. 시민과 통치자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참여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도 여전히 좀 막연합니다. (중략) 그렇다면 한 단계 높은 정치적 창의성은 우리 제도에 무엇을 요구할까요? 그 제도가 새로운 모습으로 작동되기를 요구합니다.' -67쪽


 나는 정치를 모른다. 사실 무관심했다. 대략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 분위기만 간신히 파악했을 뿐 그 속에 직접 '참여'하여 몸 담굴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저자 스테판 에셀은 기꺼이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분노'하길 바란다. 그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정말 읽기만 해서는 완독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내 삶에 대한 반성으로 이 책을 완독할 생각이다. 

 

 이번 3차 남북정상회담을 보고 또 2018년 종전 선언까지 나온 지금 상황을 보면서 스테판 에셀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는 때로 모든 것은 내치고 달리는 폭풍과도 같지만 실제로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두려운 것은 실제로 인권침해로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우리가 완전히 놔버리게 되는 게 아닐까이다. 종전을 함으로써 휴전국가라는 위험은 사라지지만 북한 독재체재는 굳건할 것이다. 나는 이게 무섭다. 세계가 전환되는 지금, 나는 내 나름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대중 매체에서 선전하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나는 자격증 공부를 위주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게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분노를 터트릴 수 있을까? 

내 미래를 생각한다. 예상되는 미래는 아마 어둡지만 좀 더 밝았으면 싶다. 저자처럼 분노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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